1. 아티스트 소개
Alison Balsom(앨리슨 발섬)은 클래식 트럼펫의 한계를 스스로 다시 설정한 영국의 독보적인 트럼페터다. 길드홀 음악학교와 파리 국립고등음악원(Conservatoire de Paris), 그리고 트럼펫의 거장 호칸 하르덴베르거에게 사사하며 탁월한 기량을 연마했다. 그라모폰 매거진 '올해의 아티스트' 상을 수상한 최초의 영국 여성이며, 2009년에는 클래시컬 브릿 어워즈 '올해의 여성 아티스트'를 수상하고 BBC 프롬스 라스트 나잇을 단독으로 헤드라인으로 장식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녀의 음악적 특징은 트럼펫이라는 악기가 가진 금관의 날카로움을 철저히 통제하여 현악기나 목관악기에 버금가는 서정성과 호흡감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협주곡 레퍼토리부터 바로크, 그리고 크로스오버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는 탐구 정신이 그녀를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클래식 연주자로 만들었다.
2. 앨범 특징 및 배경
Paris는 발섬이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수학했던 시간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한 앨범으로, 파리라는 도시와 연결된 음악들을 트럼펫이라는 하나의 목소리로 엮어낸 작품이다. 2014년 5월 런던 엔젤 스튜디오에서 녹음됐으며, 재즈 트럼페터이자 작곡가인 가이 바커(Guy Barker)와 발섬이 공동으로 프로듀싱하고 편곡을 맡았다. 레퍼토리의 범위는 실로 광활하다. 에릭 사티, 라벨, 뒤뤼플레, 메시앙 같은 20세기 프랑스 작곡가들부터 피아졸라의 탱고, 장고 라인하르트의 집시 재즈, 그리고 조제프 코스마의 샹송까지 아우른다. 기타리스트 밀로슈 카라다글리치가 참여하는 등 일부 객원 아티스트가 함께했다. 전체 분위기는 화려한 기교보다 깊은 여백과 서정성에 무게를 둔다. 트럼펫이 이토록 속삭이듯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접하는 청자에게 이 앨범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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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ymnopedie No. 3 – Erik Satie * 2. Cafe 1930 – Astor Piazzolla * 3. Oblivion – Astor Piazzolla * 4. La Valse Des Lilas – Michel Legrand, Eddy Marnay, Eddie Barclay * 5. Le Baiser De L'Enfants Jesus (Très Lent, Calme) – Olivier Messiaen 6. Le Baiser De L'Enfants Jesus (Modéré) – Olivier Messiaen 7. Le Baiser De L'Enfants Jesus (Modéré) – Olivier Messiaen 8. Pièce En Forme De Habanera – Maurice Ravel 9. Piano Concerto In G - Adagio Assai – Maurice Ravel * 10. Gnossienne No. 3 – Erik Satie 11. Les Feuilles Mortes (Autumn Leaves) – Joseph Kosma 12. Nuages – Django Reinhardt * |
3. 트랙별 감상
Track 3 — Oblivion (Piazzolla)
'망각'이라는 제목처럼 모든 것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듯한 애절한 선율이 특징이다. 앞선 트랙 Café 1930의 여운을 이어받으면서도 감정의 선이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반도네온 없이도 피아졸라 특유의 애수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발섬의 호흡 조절이 탁월하며, 오케스트레이션과의 조화가 깊은 감정적 여운을 남긴다.
Track 4 — La Valse des Lilas (Michel Legrand)
미셸 르그랑이 쓴 '라일락 왈츠'. 앞선 피아졸라 두 곡이 다소 무겁고 정적이었다면, 이 곡은 제목처럼 파리의 봄날 같은 화사함과 우아함이 공존한다. 앨범 전체 흐름에서 적절한 환기 역할을 하면서도, 발섬 특유의 매끄럽고 따뜻한 톤이 가장 자연스럽게 살아있는 트랙이다.
Track 9 — Piano Concerto in G: Adagio assai (Ravel)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2악장을 트럼펫으로 새롭게 녹여냈다. 원곡의 서정성이 발섬의 은은한 톤과 만나 극강의 평온함을 선사한다. 짐노페디의 정적인 호흡을 좋아한다면 이 곡의 느릿하고 긴 선율에도 깊이 매료될 것이다.
Track 12 — Nuages (Django Reinhardt)
전설적인 집시 재즈 기타리스트 장고 라인하르트의 곡으로 앨범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집시 재즈의 무드를 유지하면서도 클래식한 우아함을 잃지 않는 세련된 편곡이 돋보이며, 앨범 전체를 만족스럽게 마무리 짓는 결말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4. 내가 좋아하는 트랙과 포인트
이 앨범에서 가장 자주 꺼내 듣게 되는 두 곡은 Track 1 — 3 Gymnopédies: III. Lent et grave와 Track 2 — Histoire du tango: II. Café 1930이다.
Gymnopédies No. 3는 에릭 사티가 19세기말 피아노로 그려냈던 미니멀하고 몽환적인 공허함이, 발섬의 트럼펫을 통해 전혀 다른 생명력을 얻는다. 원곡의 절제된 미학은 그대로 유지하되, 트럼펫 특유의 길고 섬세한 호흡이 더해지며 훨씬 노래하듯 따뜻하고 인간적인 울림을 만들어낸다. 정적 속에서 음 하나하나에 실린 연주자의 숨결은 파리의 텅 빈 새벽 거리를 걷는 듯한 깊은 여운을 남긴다.
Café 1930은 화려한 춤곡의 굴레를 벗고 오직 감상을 위해 태어난 피아졸라의 탱고를 담아낸다. 기타리스트 밀로슈 카라다글리치와의 트럼펫-기타 듀엣이 어두운 재즈-댄스 특유의 뉘앙스를 절묘하게 포착한다. 반도네온의 거친 숨결 대신 세련된 현악 배경 위에 얹힌 트럼펫 선율은 지나간 시대에 대한 향수와 낭만을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미묘하게 떨리는 비브라토가 카페 구석에서 느끼는 고독과 감정의 흔들림을 섬세하게 투영하며, 탱고 특유의 애수를 클래식한 우아함으로 승화시킨 수작이다.
5. 총평 및 추천 이유
"트럼펫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소리로, 파리라는 도시를 음악으로 여행하게 만드는 힘"
Paris는 트럼펫 특유의 강렬한 금관 사운드 대신, 파리의 밤을 닮은 부드럽고 섬세한 호흡으로 채워진 수작이다. 사티와 라벨의 우아함에서 피아졸라의 어둡고 감성적인 탱고까지, 그리고 메시앙 특유의 깊이 있는 울림을 거쳐 마지막에는 샹송과 재즈로 이완되는 흐름은 어느 한 장면도 쉽게 지나치기 어려운 연속적인 몰입을 만들어낸다.
트럼펫을 조용한 모드로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것은 수준 낮은 연주자에겐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며, 발섬의 손에서 그것은 최면적인 경험으로 변한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선율, 악기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서정성, 그리고 음악으로 완성된 파리 여행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가 이 앨범의 가치를 요약한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는 물론, 평소 트럼펫이라는 악기와 거리를 뒀던 이들에게도 가장 친절한 입문서가 되는 앨범이다. 피아노 음악이나 재즈 발라드를 즐겨 듣는 이라면 더욱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으며, 파리라는 도시에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는 이에게는 음악으로 떠나는 가장 감성적인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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