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 발라드는 감정을 더욱 깊고 섬세하게 표현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뱅크의 The Bank는 서정적인 멜로디와 풍성한 편곡, 감성적인 보컬을 바탕으로 록과 발라드의 경계를 넘나들며 당시 한국 대중음악에 새로운 색채를 더한 작품이다.
정시로를 중심으로 출발한 프로젝트 밴드 뱅크
뱅크(Bank)는 1995년 정시로를 중심으로 결성된 프로젝트 밴드로 데뷔했다. 초기에는 정시로와 설처용(김바다)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멤버 구성이 바뀌면서 정시로 중심의 프로젝트 성격이 강해졌다. 현재 주요 음원 서비스에서도 뱅크는 정시로를 중심으로 한 그룹으로 소개된다.
정시로는 뱅크의 음악에서 작곡과 편곡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다. 대표곡 '가질 수 없는 너' 역시 강은경이 작사하고 정시로가 작곡과 편곡을 맡았다.
1집에 참여한 설처용은 본명 김정남으로, 이후 김바다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록 보컬리스트다. 뱅크에서는 설처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으며 '야누스의 이별', '아버지 전상서', '편견' 등에서 그의 보컬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시나위', '나비효과' 등에서 보컬로 활동하면서 록 음악 팬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이처럼 The Bank는 처음부터 한 가지 색깔로 정리하기 어려운 앨범이다. 정시로가 보여주는 서정적인 멜로디와 설처용의 강한 록 보컬이 한 작품 안에서 공존하면서 1990년대 중반 한국 대중음악에서 발라드와 록이 만나는 독특한 지점을 만들어냈다.
뱅크의 출발점을 담은 The Bank
1995년 5월 1일 킹 레코드에서 발매된 The Bank는 뱅크의 정규 1집이다. 당시 뱅크는 정시로를 중심으로 서정적인 멜로디와 발라드 감성을 들려주면서도, 일부 곡에서는 강한 기타와 거친 보컬을 앞세운 록적인 접근을 함께 보여줬다. 앨범의 중심에는 정시로가 만들어낸 섬세한 멜로디와 편곡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설처용의 직선적이고 거친 보컬이 더해지면서 곡마다 상당히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특히 부드러운 발라드와 록적인 사운드가 한 앨범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다는 점에서 이후 뱅크의 음악적 방향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대표곡 '가질 수 없는 너'는 강은경이 작사하고 정시로가 작곡과 편곡을 맡은 곡으로, 앨범의 서정적인 색깔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록적인 사운드와 서로 다른 두 보컬의 대비가 어우러지면서 초기 뱅크가 지닌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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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성과 록의 대비가 돋보이는 주요 트랙
야누스의 이별
앨범 초반부에서 뱅크의 서정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곡이다. 이별이라는 감정을 비교적 차분하게 풀어내면서 멜로디의 흐름에 따라 분위기를 점차 깊게 만든다. 정시로의 솔로 보컬이 곡 전체를 이끌며, 감정을 과도하게 끌어올리기보다 담담하게 표현해 가사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화려한 편곡보다는 멜로디와 보컬의 감정선에 집중한 구성이 특징이며, 초기 뱅크가 가진 서정적인 음악성을 잘 보여주는 트랙이다.
어느 피로연에서
이별한 연인을 결혼식장에서 다시 마주하는 상황을 소재로 한 곡이다. 행복해야 할 공간과 화자의 복잡한 감정이 대비되면서 쓸쓸한 분위기를 만든다. 화려한 연주보다 멜로디와 가사의 정서에 집중하며, 정시로의 차분한 보컬이 이러한 감정을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특히 특정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별의 감정을 풀어내는 방식에서 1990년대 한국 발라드 특유의 서사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 전상서
The Bank에서 록적인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곡 가운데 하나다. 설처용의 거칠고 강한 보컬이 곡의 중심에서 강한 인상을 남기며 정시로의 음색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보컬의 차이는 곡에 긴장감을 더하면서 앨범의 서정적인 곡들과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이후 시나위에서 김바다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되는 설처용의 초기 보컬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게 들을 만하다.
편견
앨범에서 가장 빠른 진행과 강한 비트가 두드러지는 곡이다. 드럼과 베이스, 신스가 중심을 이루는 반주 위로 두 보컬이 서로 주고받으며 곡을 이끌어간다. 설처용은 이 곡에서 거친 록 보컬보다 비교적 부드러운 음색으로 노래해 정시로의 보컬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빠른 비트와 두 보컬의 교차, 그리고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내용의 트랙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세 곡
Lovely Tonight (혼자가 된 지금에야)
개인적으로 특히 애청하는 트랙이다. 대중적으로는 '가질 수 없는 너'에 가려져 있지만,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면 뱅크가 가진 서정적인 감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숨은 명곡으로 다가온다. 애절한 멜로디 위에서 정시로의 보컬은 감정을 과하게 끌어올리기보다 차분하게 쌓아간다. 그 때문에 곡이 전하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대표곡의 강한 인상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정시로의 보컬과 작곡 능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The Bank를 다시 들을 때 함께 주목해볼 만한 곡이다.
가질 수 없는 너
The Bank를 대표하는 곡이자 뱅크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대표곡이다. 강은경이 작사하고 정시로가 작곡과 편곡을 맡은 이 곡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소재로 하면서도 단순한 이별 노래에 머물지 않는다.
곡의 핵심은 애절한 멜로디와 정시로의 보컬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흐름이다. 특히 후렴으로 이어지면서 멜로디의 감정이 크게 확장되고, 정시로의 호소력 있는 보컬이 곡의 중심을 잡는다.
이 곡이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이별의 상황을 거창하게 꾸미기보다 사랑하지만 결국 상대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의 감정을 비교적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후 여러 가수들이 이 곡을 다시 부르면서 오랫동안 회자된 것도 이러한 보편적인 정서와 강한 멜로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곡을 통해 정시로가 가진 멜로디 메이킹 능력과 편곡 감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The Bank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는 곡이며, 뱅크의 대표곡으로 남은 이유도 분명하다.
그대 내 품에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그대 내 품에'는 어쿠스틱 기타로 시작해 따뜻한 멜로디를 들려주는 곡이다. 원곡은 유재하가 만들고 부른 곡으로, 이후 김현식의 버전으로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뱅크의 해석과 비교해서 들어보는 재미가 있다.
유재하와 김현식의 버전이 보다 따뜻하고 포근한 정서를 강조한다면, 뱅크의 버전은 조금 더 차갑고 도시적인 분위기로 다가온다. 어쿠스틱 기타를 중심으로 시작하지만 전체적인 편곡에서 느껴지는 음색과 공간감이 원곡과는 다른 인상을 만든다.
때문에 익숙한 곡을 단순히 다시 부른 커버라기보다 뱅크의 음악적 색깔을 입힌 새로운 해석으로 들을 수 있다. 앨범의 마지막에 배치된 것도 인상적이다. 앞선 곡들에서 이어진 감정의 흐름을 부드럽게 정리하면서도, 완전히 따뜻한 분위기로 끝내기보다는 뱅크 특유의 쓸쓸하고 도시적인 여운을 남긴다.
정시로의 음악적 역량이 돋보이는 데뷔작
The Bank는 The Bank는 '가질 수 없는 너'로 대표되는 서정적인 발라드를 중심에 두면서도 곡에 따라 서로 다른 편곡과 보컬을 시도한 앨범이다. 정시로가 만들어낸 감성적인 멜로디가 전체적인 중심을 이루며, 곡의 성격에 따라 팝과 록적인 요소가 더해진다. 설처용의 거친 보컬은 '야누스의 이별'의 도입부와 '아버지 전상서' 등 특정 부분에서 강하게 등장해 곡의 분위기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앨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정시로의 작곡과 편곡이다. '가질 수 없는 너'처럼 대중적으로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아버지 전상서'에서는 강한 보컬을 활용하고, '편견'에서는 빠른 비트와 신스, 베이스가 중심이 된 팝적인 사운드를 선보인다. 서로 다른 성격의 곡을 하나의 앨범 안에 배치하면서 초기 뱅크만의 음악적 색깔을 만들어냈다는 점도 흥미롭다.
90년대 한국 발라드를 좋아한다면 '가질 수 없는 너'를 중심으로 감상하기 좋으며, 뱅크 1집의 다른 면까지 살펴보고 싶다면 '아버지 전상서'와 '편견'을 함께 들어볼 만하다. 여기에 'Lovely Tonight (혼자가 된 지금에야)'처럼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곡과 유재하의 '그대 내 품에'를 뱅크의 해석으로 비교해 듣는 것도 좋은 감상 포인트다.
결국 The Bank는 뱅크가 이후 보여줄 서정적인 음악의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는 동시에, 다양한 편곡과 보컬을 통해 여러 음악적 색깔을 시도했던 데뷔작이다. 특히 정시로의 멜로디와 편곡에 관심이 있거나 1990년대 한국 발라드의 음악적 흐름을 찾아 듣는 사람이라면 대표곡뿐 아니라 앨범 전체를 통해 초기 뱅크의 모습을 살펴볼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