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의 사랑과 청춘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 남은 한 편의 이야기처럼 변한다. 전설은 사랑과 이별, 그리움과 청춘의 감정을 복고적인 사운드와 섬세한 멜로디에 담아내며 잔나비가 지닌 서정적인 음악 세계를 깊이 있게 보여준다.
1960~70년대 음악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잔나비
잔나비는 최정훈을 중심으로 2012년 결성된 밴드로, 2014년 싱글 ‘로켓트’로 정식 데뷔했다. 1960~70년대 팝과 록, 한국 대중가요에서 받은 영향을 바탕으로 복고적인 멜로디와 빈티지한 사운드를 현대적인 밴드 음악으로 풀어내며 자신들의 색깔을 만들어왔다. 특히 최정훈의 힘을 과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독특한 보컬은 잔나비 음악을 구분 짓는 중요한 특징이다. 초기 홍대 인디 신에서 활동한 뒤 2016년 정규 1집 MONKEY HOTEL을 발표했고, 2019년 정규 2집 전설을 통해 대중적인 인지도를 크게 넓혔다. 특히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음원 차트에서 장기간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밴드의 이름이 인디 음악 팬층을 넘어 넓은 대중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당시 멤버는 최정훈, 김도형, 유영현, 장경준, 윤결의 5인조였으며, 기타·건반·베이스·드럼을 중심으로 한 밴드 편성과 복고적인 멜로디를 바탕으로 자신들만의 음악적 색깔을 만들어왔다. 특히 기타의 빈티지한 질감과 최정훈의 독특한 창법이 결합되면서 과거의 음악을 참고하면서도 단순한 복고 재현과는 다른 인상을 만들었다. 대중적인 멜로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곡에 따라 포크, 록, 팝 등 다양한 요소를 자연스럽게 섞어내는 점도 잔나비 음악의 특징이다.
청춘의 여러 장면을 담아낸 두 번째 정규 앨범
2019년 3월 13일 발표한 전설은 잔나비의 정규 2집으로, 모던 록·인디 록을 기반으로 챔버 팝적인 편곡까지 아우른 12곡의 앨범이다. 프로듀서는 최정훈이 맡았으며, 앨범의 핵심에는 ‘언젠가는 사라져 전설처럼 남을 청춘의 시간’이라는 시선이 놓여 있다. 최정훈 역시 앨범을 두고 언젠가는 사라져 전설처럼 남을 청춘의 처절했던 시간을 이야기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앨범 제목의 ‘전설’은 과거의 위대한 인물을 뜻하기보다 누구에게나 지나가고 나면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청춘에 가깝다. 단순히 청춘을 밝고 아름다운 시기로 그리지 않고 사랑과 불안, 꿈과 상실을 함께 바라본다는 점이 특징이다. 음악적으로는 비틀스와 퀸, 비치 보이스 같은 서구 팝뿐 아니라 산울림, 유재하 등 이전 세대 한국 음악의 정취도 바탕에 깔려 있다. 기타와 베이스, 드럼을 중심으로 한 밴드 사운드에 현악과 브라스, 합창 등을 더해 곡마다 서로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빈티지한 음색과 공간감 있는 편곡을 활용하면서도 각각의 곡이 따로 놀지 않도록 구성해 앨범 전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당시 잔나비는 이전 세대 음악의 정취를 의도적으로 참고하면서도 오래된 음악처럼 들리는 데 그치지 않도록 악기 톤과 잔향을 세심하게 다듬었다. 그 결과 복고적인 멜로디와 현대적인 인디록의 질감이 함께 살아났다. 대중적인 후렴을 갖춘 곡과 실험적인 수록곡을 한 앨범에 함께 배치한 구성 역시 이 작품을 단순한 히트 앨범과 구분하는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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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고적 사운드와 다양한 색채가 공존하는 주요곡
나의 기쁨 나의 노래 (Intro)
앨범의 문을 여는 인트로로, 조용한 밤과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전설의 정서를 미리 보여준다. 가사 자체가 노래와 시가 될 수 있는 마음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도 이후 이어질 청춘의 정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가볍게 시작하지만 합창의 울림을 더해 단순한 도입부 이상의 역할을 하며, 뒤이어 펼쳐질 청춘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조이풀 조이풀
밝고 경쾌한 멜로디를 중심으로 스트링과 브라스의 풍성한 편곡을 들려준다. 잔나비 특유의 복고적인 감각을 비교적 밝은 방향으로 풀어낸 곡으로, 힘을 빼고 부르는 최정훈의 보컬과 활기찬 연주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앨범 안에서 분위기를 환기하면서 잔나비가 가진 대중적인 멜로디 감각을 보여주는 트랙이기도 하다.
DOLMARO
앨범에서 독특한 리듬과 사운드 구성이 돋보이는 트랙이다. 단순한 기타 중심의 인디록에서 벗어나 여러 악기의 질감과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전설이 한 가지 색깔만으로 이어지는 앨범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익숙한 복고풍 멜로디와는 다른 리듬감이 들어가 있어 중간 지점에서 앨범의 흐름을 한 번 환기하는 효과도 있다.
신나는 잠
느긋한 리듬과 포크적인 멜로디가 어우러진 곡으로, 앨범 안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들려준다. 특히 멜로디와 악기의 흐름에서는 이탈리아 싱어송라이터 안젤로 브란두아르디를 연상시키는 포크 음악의 색채가 강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밝은 포크록으로만 듣기보다는 이런 이국적인 선율과 악기 배치에 귀를 기울이면 곡의 개성이 더 잘 드러난다.
나쁜 꿈
앨범에서 록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트랙이다. 앞선 곡들이 비교적 부드럽고 밝은 편곡을 보여준다면 이 곡은 기타와 리듬 섹션의 존재감이 한층 크게 다가온다. 불안과 상실을 담은 정서 위에 독특한 기타 톤과 밴드의 거친 질감이 더해져 다른 수록곡과 차이를 만든다. 부드러운 복고 팝에만 머물지 않는 잔나비의 음악적 폭을 확인할 수 있는 곡이다.
개인적으로 오래 남은 세 곡
투게더!
앨범에서 가장 경쾌하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가진 곡 가운데 하나다. 리듬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스트링 편곡이 곡의 활기를 더하고, 최정훈의 보컬도 밝은 멜로디를 따라 비교적 가볍게 흘러간다. 개인적으로는 전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을 때 앨범의 분위기를 환기해 주는 역할이 특히 마음에 든다. 무겁거나 아련한 정서에만 머물지 않고 청춘의 순간을 그대로 즐기는 듯한 느낌이 있어 공연에서도 잘 어울릴 만한 곡이라고 느꼈다. 특히 밝은 리듬과 스트링이 함께 움직이는 부분에서는 잔나비가 가진 대중적인 멜로디 감각이 가장 편안하게 드러난다.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서정적인 멜로디와 사랑의 시작과 끝을 바라보는 가사가 인상적인 타이틀곡이다. 최정훈의 보컬은 과하게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으면서도 후렴으로 갈수록 곡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끌어올린다. 특히 멜로디가 쉽게 기억되는 동시에 가사의 쓸쓸한 정서를 놓치지 않는 점이 좋다. 2019년 멜론 5월 월간 차트 1위에 올랐고, 이듬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노래와 최우수 모던록 노래를 수상하며 앨범을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 잡았다. 개인적으로는 화려한 편곡보다 멜로디와 보컬이 앞에 놓여 있어 반복해서 들어도 곡의 핵심 정서가 쉽게 흐려지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꿈과 책과 힘과 벽
앨범 후반부를 장식하는 곡으로, 개인적인 감정과 청춘에 대한 생각을 보다 넓은 이야기로 확장한다. 몽환적으로 펼쳐지는 편곡과 반복적으로 쌓이는 멜로디가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며, 최정훈의 보컬도 곡의 흐름을 따라 차분하게 중심을 잡는다. 특히 후반부에 코러스가 겹쳐지면서 사운드의 공간감이 커지고, 곡 전체에 신비롭고 부유하는 듯한 분위기가 강해진다. 개인적으로는 전설을 들은 뒤 앨범이 이야기하는 청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곡이다. 화려한 멜로디보다 이러한 몽환적인 분위기와 후반부의 코러스가 오래 기억에 남으며, 앨범의 서정적인 정서를 마무리하는 데 잘 어울리는 트랙이다.
잔나비의 음악적 방향을 확실하게 보여준 전환점
전설은 잔나비가 복고적인 취향을 자신들만의 음악적 언어로 정리한 앨범이었다. 단순히 ‘옛 음악을 잘 재현한 밴드’라는 인상을 넘어, 자신들이 좋아하는 시대의 음악을 현재의 청춘과 연결하는 방법을 보여줬다는 데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음악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익숙한 팝과 록의 문법을 가져오면서도 최정훈의 보컬과 잔나비 특유의 기타 사운드, 그리고 현악, 브라스, 합창을 결합해 2019년의 밴드 음악으로 다시 만들어냈다. 전작 MONKEY HOTEL보다 내면적인 정서가 강해졌고, 곡마다 인물과 분위기를 달리했던 이전 작업에서 한층 넓게 청춘이라는 주제를 바라보려는 방향도 드러났다.
무엇보다 타이틀곡의 성공만으로 앨범의 가치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 중요하다. ‘투게더!’, ‘조이풀 조이풀’, ‘DOLMARO’, ‘신나는 잠’, ‘나쁜 꿈’, ‘꿈과 책과 힘과 벽’은 서로 다른 색채를 보여주면서도 하나의 앨범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덕분에 전설은 특정한 히트곡을 중심으로 소비하기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을 따라 들을 때 장점이 더 잘 드러난다. 앞부분의 밝고 경쾌한 곡에서 중반의 개성적인 트랙, 후반의 서정적인 곡으로 이어지는 흐름도 자연스럽다. 이런 구성 덕분에 앨범을 한 곡씩 따로 듣는 것과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듣는 경험 사이에 차이가 생긴다.
잔나비를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음악적 색깔을 이해하기 좋은 대표작이며, 복고적인 팝과 록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풀어낸 음악을 좋아한다면 추천할 만한 앨범이다.
